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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과 자유의 표상

4.18 고대생 의거 60주년 기념 특별전 “반항과 자유의 표상”

주최 :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록자료실

전시기간 : 2020. 04. 18 ~ 2020. 09. 19

전시장소 :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실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1960년 4월 18일. 고대생 3천여 명은 학생대표의 선언문 낭독과 함께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내디딘 의로운 걸음이었습니다. 이날의 의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시대를 넘어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습니다.
202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는 4.18 고대생 의거 6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정의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담은 구호를 따라 그날의 여정을 되짚어 보며 그 의의를 되새기기 위해 기획한 자리입니다. 민주이념 쟁취를 위한 정의의 함성과 희생이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를 바라며 그날의 고동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 사진 및 주요 유물 소개


“급고! 12시 50분 전원 본관 앞으로 집합”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하지만 조별 공개투표, 부정 개표, 유권자 협박 등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였음이 알려지며 사회적 불만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었습니다. 4월 1일 개강을 맞이한 고려대학교 교정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4월 18일 월요일 12시 50분 본관 앞에 모인 고대생 3000여 명은 선언문을 읽고 거리로 나아갔습니다.


▲ 전시 도입부 이미지 월
▲ 좌: 4.18 선언문, 박찬세(법학55), 2007년 재작성

우: 정경대학생위원장 이세기(정외57)의 4.18 선언문 낭독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거리로 나선 고대생들은 머리에 수건을 둘러메고, 손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경찰들이 주요한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를 저지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은 연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신설동, 동대문, 종로로 나아갔습니다. 거리의 시민들은 고대생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응원하였습니다.


▲ 4.18 의거 당시의 수건
이 수건은 1960년 고려대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기념품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단과대학 학생위원회에서 신입생환영회를 계기로 시위를 조직하려 했기 때문에 신입생의 규모를 훨씬 상회하는 5000장이 제작되었고, 4월 18일 본관 앞에 모인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3천 명의 학생들은 ‘고대’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거리로 나섰다.
▲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달려나가는 학생들

“민주역적 몰아내자!”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청사) 앞에 집결한 고대생들은 연좌시위를 벌이며 연행 학생의 석방과 부정선거에 대한 정부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연좌시위는 거대한 공론의 장이 되었고, 수많은 학생이 자유로운 발언을 이어나갔습니다.


▲ 전시 사진 1
▲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을 하며 자유발언을 이어나가는 고대생들의 모습이다. 유진오 총장은 학생들의 불의에 대한 항거를 격려하며, 사회질서를 위해 안전하게 학교로 돌아가자 권고했다.
(고려대학교 역사영상아카이브 제공)

“민주주의 사수하자!”


유진오 총장의 노력으로 연행된 학생들이 모두 석방되자 국회의사당에 모인 고대생들은 시위를 해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오던 시위대가 청계천 4가 천일 백화점 부근을 지날 무렵 무장한 깡패들이 나타나 습격했고 여러 학생이 다치게 됩니다. 정치 깡패에 의한 고대생 피습은 전 국민을 분노케 하여 4·19혁명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 전시 사진 2
▲ 4.18 직후 여러 차례 걸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상자 명단의 초안과 정서본. 학과와 학년별 필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학생위원회에서 작성한 부상자 명단으로 추정된다. 2020년 4.19 혁명 60주년을 맞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어제의 시위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4월 19일 아침 고대생 피습 사실이 일간지에 보도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고대생들 역시 ‘어제의 시위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되물으며 2차 시위를 감행했습니다. 한편 군 제대 이후 복학을 준비하던 본교 화학과 54학번 김왈영(金曰寧)은 후배들의 시위 소식을 접한 뒤 경무대 진격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사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이날 아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날의 희생은 사회 각계각층의 행동을 끌어냈습니다. 결국, 일주일 뒤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 전시 사진 3
▲ 화학과 54학번 김왈영 학부
▲ 1962년 건국포장 수여를 위해 작성한 공적조서. 김왈영의 사망경위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 1960년 4월 21일 조선일보 호회 4.19 희생자 명단.
‘김왈영’의 이름이 ‘김일녕’으로 잘못 기록되어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1961년 4.18의거 1주년을 맞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4.18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1969년부터는 4.18 기념탑을 출발해 4.19 국립묘지를 돌아오는 왕복 16km의 기념 마라톤 대회가 처음 개최되었다. 마라톤 대회는 1980년대 중반 현재와 같은 거리 시위 형태로 변형되었고 ‘대행진’ 또는 ‘대장정’ 등으로 불리며 고려대를 대표하는 전통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1969년 제1회 4.18의거 기념 마라톤 대회
▲ 전시 사진 4

▲ 1969년 4.18의거 제9주년 기념행사 안내 리플렛





지도로 보는 4.18 고대생 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