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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 깃발이 날리는 곳에

고려대학교 스포츠 역사 특별전 1

주최 :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록자료실

전시기간 : 2021년 9월 9일(금) ~ 2021년 10월 30일(토)

전시장소 :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실(1층)

2021년은 보성전문학교의 운동부가 공식대회에 첫 출전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원동력이 된 보전 운동부의 활약상과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 특별전을 기획했습니다. 보전 깃발을 휘날리며 힘차게 운동장을 누볐던 학생들의 열정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소개


보성 전문학교와 스포츠


스포츠는 보전 학생들의 일상 깊숙이 자리잡은 삶의 일부였다. 전교생 580명 가운데 300명이 운동부에 가입해 있었으며, 운동부원들은 각자 소속된 운동부 배지를 교복의 오른쪽 옷깃에 달았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운동장에는 교기와 학생회기가 휘날렸고 교복을 입은 수백명의 학생들이 교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그 중에서도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구성된 삼각 깃발은 운동 경기가 개최될 때마다 학교를 상징하는 깃발로 꾸준히 사용되었다.


연식정구의 제왕 정구부


1921년 10월 보전친목회에서는 제1회 전조선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박상근과 오병근 등이 출전한 이 대회는 보전 운동부가 참가한 최초의 공식 대회였다. 정구부는 이 대회를 계기로 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교 최초의 공식대회 우승 기록 역시 정구부가 갖고 있다. 정구부는 창단 3년만인 1924년 제2회 전조선전문학교 연합정구대회에서 우승해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숙명의 라이벌 연희전문과 대결한 최초의 운동부 역시 정구부이다. 정구부는 1925년 제5회 전조선정구대회에서 연전을 맞아 3:1로 승리하며 최초의 보연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제 1 회 전조선정구대회에 참가 선수

박상근(왼쪽) 과 오병근(오른쪽)

보전이 처음으로 우승한 제 2 회 전조선전문학교

연합정구대회의 우승기와 우승컵

최초의 보연전에 출전했던 정구부

선수들(1925)




보전의 자랑, 축구부


1922년 창설된 축구부는 1928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첫 우승한 이래 식민지 조선 축구의 대들보 역할을 하며 김원겸, 김용식, 배종호, 박효제, 최성곤 등 수많은 축구 스타를 길러냈다. 그 중에서도 김용식은 한국 축구의 전설로 불린다. 그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1936년 베를린올림픽 축구경기에 출전했으며, 1948년 태극기를 달고 한 번 더 올림픽에 나갔다. 현재 김용식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축구부원들(1940)

축구부는 창단 이래 흰색 유니폼을 착용하였으나 1930년대 후반 김용식의 제안에 따라 빨간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줄무늬 유니폼을 채택하였다. 김용식이 제안한 유니폼은 영국 프로축구 선덜랜드(Sunderland AFC)의 유니폼을 모델로 하였으며 지금까지 축구부의 유니폼으로 사용되고 있다.

축구부 최초의 우승기

축구부는 1928년 관서체육회에서 주최한 전조선축구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이래 1931년까지 대회
4연패를 달성함으로써 우승기를 영구보관하게 되었다.

김용식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 보도
(동아일보 1936.06.28)

마라톤왕 손기정과 육상부


1923년 영어강사 여운홍이 창단한 보전 육상부는 경수역전경주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는 등 중장거리의 전통적 강자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필드경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육상계의 보물(至寶)로 불린 해머던지기의 1인자 백승욱과 장대높이뛰기 최강자 소진남 등의 선수를 배출하였다. 또한 1939년부터 41년까지 세단뛰기 세계랭킹 1위였던 ‘동양 최고의 다리’ 김원권 역시 보전 육상부 출신이다.


보전교복을 입고 있는 손기정과 손기정의 이름이 수록된 입학기념 사진첩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은 올림픽 신기록 세우며 우승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민족감정의 고조를 우려한 식민지 당국은 손기정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7년 보전 상과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만에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손기정은 해방 이후 보스톤마라톤 우승자 서윤복과 함기용을 지도하며 한국마라톤 발전에 기여하였고 본교는 1996년 손기정에게 명예졸업장(제1호)을 수여하였다.

1940년대 육상부 선수들의 모습


농구조선의 무적함대, 보전 농구부


농구부는 김화집과 김화영 등이 주축이 되어 1928년 창단되었다. 1929년 전조선중등전문부 농구선수권대회에서 첫우승한 이래 수많은 대회를 제패하며 한국 농구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였다.
1938년~1940년 보전 농구부의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 3연패는 한국농구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 3연패 당시의 베스트5

왼쪽부터 조득준, 이호선, 안창건, 오수철, 오중렬 다섯명의 선수는 모두 상과 37학번이다.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 2연패 직후

상과의 김광진(왼쪽), 김영주(오른쪽) 교수와 함께 촬영한 사진



한국 럭비의 효시, 보전 럭비부


1929년 5월 이종완이 주축이 되어 창단된 보전 럭비부는 한국 최초의 럭비팀으로서 럭비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0년 전국추계리그에서 처음 우승한 이래 조선 내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는 '무적함대', '힘의 보전'으로 불리며 일제하 20여개 대회에서 우승 기록을 남겼다.


1931년 12월 오사카에서 열린 제7회 전일본고등전문럭비대회에 출전한

럭비부 선수들(ⓒ대한체육회)

럭비부 페넌트(1931)

오른쪽 사진 속 페넌트의 실물

“이번 럭비 원정을 오사카까지 갔었는데 우리 팀 멤버들은 키가 모두 후리후리하게 컸기 때문에 관중들에게 더 큰 흥미를 주었습니다. 오사카 정거장에 내리니까 벌써 ‘에구 키도 크다’하고 모두 놀라면서 어떤 사람은 와서 키를 비교해 보기도 합디다. 더구나 안태경군이 그 길쭉한 공을 한 손으로 들고 왔다갔다 하니까 길거리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안군만 쳐다보았지요.” (『 신동아 』 1934년 3월호)

보연전과 응원문화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는 1925년 제5회 전조선정구대회에서 처음 맞대결을 펼쳤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언제나 교기와 학생회기가 휘날렸고, 교복과 교모를 착용한 수백명의 학생들은 교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연희전문이 서양풍의 취주악으로 응원을 한 것과 달리 보성전문에서는 전통적인 농악으로 응원을 이끌었다. 각종 경기에서 양교가 맞붙는 일이 잦아지자, 1930년대 이후 두 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강력한 라이벌 의식이 형성되었다.


응원가로 널리 사용된 보전 교가
깃발을 날리며 응원에 나선 보전 학생들(1927)
학생회가와

응원가를 작곡한
조병학(법과 30)

“(보전은) 스포츠 왕국을 건설하고 있는 연전에 대항하여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보전왕국 건설에 갖은 노력을 다하여 연전과의 대항전에 있어서는 전경성, 아니 전조선 이모저모까지 그 인기가 비등하여 천하를 이분하는 느낌이다”
(『 조선체육계 』 제1호, 1934)